[영화평 7] <멋진 하루> 멋진 하루 혹은 후진 하루

춤추는거미 | 2008.11.03 10:45 | 조회 8307

<멋진 하루> 멋진 하루 혹은 후진 하루


“꿔 간 돈 갚아!”라는 여자의 일성(一聲)은 일 년 만에 재회한 남자를 어색하게 만든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지난 일 년을 기억하는 것은 차용증이라고 쓰인 빛바랜 종이 쪼가리일 뿐. 삶의 무게에 치인 여자의 감정은 벌써 휘발되어 날아갔다. 그래서 남자가 물어오는 안부 따위에는 대답할 겨를이 없다. 그녀는 재차 외친다. “돈 갚아!”
<멋진 하루>는 헤어진 지 일 년 만에 채권자와 채무자로 만난 ‘여자, 희수’와 ‘남자, 병운’의 하루를 쫓는다. 돈을 꿔서 돈을 갚는 병운의 기발한 변제방식이 ‘멋지게’ 끝나면 하루는 저물게 된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은 하루의 끝에서 시작한다. 병운이 희수에게 꿔 간 돈 ‘삼백오십만 원’을 다 갚으면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감독의 고민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윤기 감독은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병운이라는 어른 ‘팅커벨’을 통해 현실적인 판타지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밝혔다. 그래서 병운이는 꽤 괜찮은 녀석으로 묘사될 필요성을 갖는다. 병운이 극의 후반부에 사촌(과 그의 아내: 모터사이클족), 소연(여중생), 은정(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로 각색과정에서 추가되었다. 또한 영화의 영문제목이‘My Dear Enemy’임을 염두에 두면 병운에 대한 희수의 태도가 변화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감독은 희수와 병운이 ‘혹시 하루의 끝에서 극적인 화해를 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놓지 않게 한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방식은 자신이 준비한 결말에 대한 설득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병운이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은 일곱이다. 이들을 만나는 순서는 극의 흐름과 밀접하게 관계한다. 희수의 감정변화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만나는 한 여사(중년의 사업가)와 두 번째 세미(술집 호스티스)는 희수에게 불편한 존재들이다. 이 둘은 병운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고착시키게 한다. 이들에게 병운은 ‘귀여운 녀석’이고 ‘괜찮은 오빠’다. 이를 지켜보는 희수는 불편하기만 하다. 또한 병운이 이들에게서 돈을 꾼 다기보다 얻는 것처럼 보이기에 희수는 두 여자와 병운을 성적관계로 여기게 된다. 여전히 병운은 헤어지기 잘한 놈이다. “넌 어쩜 그대로니” 희수의 말이다.

이후 병운은 홍주(와 그의 남편: 대학써클 후배)와 스키장 제자(주차 단속반) 그리고 앞서 얘기한 사촌(모터사이클족), 소연(여중생), 은정(초등학교 동창)을 차례로 만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셈을 유도하며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하루 동안의 사건들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한다. 누구에게서 얼마를 받았는지를 명시하지 않고, 이제 얼마 남았다 또는 다음번에 얼마를 받으면 얼마가 남지 하는 식으로 돈의 액수를 매번 다른 식으로 관객에게 노출시킨다. 관객은 ‘이제 얼마 남았다’하는 셈을 상기하며 하루의 추이를 지켜본다. 숨 가쁘게 달려온 하루의 끄트머리에 병운은 약속대로 빚 삼백오십만 원을 희수에게 쥐어준다. 그런데 희수는 마지막에 만난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인 은정이 건네는 돈은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실랑이 끝에 희수는 반만 받고 나머지 돈은 돌려준다. 은정은 희수가 만난 앞선 사람들과는 다른 성격의 인물이다. ‘잤을 수 있는’여자(한 여사, 세미, 홍주, 스키장 제자), ‘한심한 놈’으로 치부하는 부부(사촌과 그의 아내), ‘아쉬울 때마다 부리는 놈’으로 여기는 선배(소연의 부)등과 달리 관계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돈의 성격 역시 은정의 돈은 어떤 대가를 암시하거나 없어도 그만인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병운에 대한 태도가 변했음을 뜻한다. 병운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좋은 조건의 남자를 선택해서 벌어진 이별이기에 희수는 꽉 채워서 돈을 받기엔 꺼림칙하다. “그래도 오늘, 멋진 하루였던 것 같다”는 병운의 소회로 영화는 결말을 향한다.

<멋진 하루>의 결말은 ‘해프닝’을 의도한다. 하루 동안의 긴 여정을 같이한 병운은 조수석에서 내리고, 다시 정처 없이 도시를 헤맨다. 오늘의 짧은 과거로 돌아간다. 희수는 병운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흔들리지만 이내 제 갈 길로 향한다. 피식 웃으며. 이윤기 감독은 마지막 쇼트에서 희수의 오늘이 아닌 내일을 설명한다. 대개의 경우 운전자는 프레임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안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멋진 하루>는 이와 반대로 했다. 운전석의 희수를 프레임 왼쪽에 위치시키고 자동차가 프레임의 반을 차지하게 했다. 이렇게 촬영된 화면은 희수를 여전히 갇혀 있는 인물로 묘사한다. 오늘은 피식하고 웃을 수 있지만, “그럼 내일은?”이라고 물으면 여전히 미지수다. 희수가 안고 있는 상처는 그대로인 채 깜깜한 도시를 달린다. 그녀의 지난 일 년까지 병운이 갚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멋진 하루>의 결말에서 이윤기 감독이 하루를 바라보는 인식에는 동의하지만, 이처럼 의도된 결말이 앞서 전개된 서사를 설명할 수 있느냐는 점에선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발단은 희수의 ‘삼백오십만 원’이다. 빚이 촉발한 하루는 희수와 병운에게 어제와 다른 비일상적인 시간을 제공한다. 일상성에서 벗어난 특정한 하루의 특별한 사건이 영화 <멋진 하루>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런데 특정한 하루의 특별한 사건의 내용은 알겠는데, 정작 이것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모르겠다. 도대체 왜 희수와 병운은 겨울날의 도시를 헤매는가? 단지 ‘삼백오십만 원’ 때문이라면 <멋진 하루>는 허무할 따름이다. 또한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멋진 하루>의 아쉬움은 희수가 병운에게서 돈을 받아야하는 이유가 표면적인 데에서 그친다는 점이다. ‘돈을 받으러 온 진짜 이유는 뭘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재한다. 희수는 일 년 전에 더 좋은 조건의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병운을 차버렸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는 실직하여 병운에게 ‘없는 것’을 상실했다. 희수의 선택은 상처를 남겼다. 절박해진 현실은 일 년 전에 헤어진 남자에게 꿔준 돈마저도 받아내기에 이른다. 꿔준 돈을 받으려고 병운을 찾는 희수의 행위는 그녀의 일 년과 화해하려는 시도로 읽혔어야 했다. 영화의 처음 장면에서 희수의 등장은 의미심장했기에 더욱 그렇다. 희수는 ‘땅값이 뛰어 횡재했다’나 ‘오늘은 뭘 먹지’ 등의 지리멸렬한 일상의 틈바구니를 가로질러 특별한 하루로 뛰어든다. 테두리를 새까맣게 칠한 눈은 그녀를 마치 사자(死者)로 보이게 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감독의 어떤 의도가 숨겨있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지난 일 년이 희수에게 어떤 성격의 시간이었으며, 과연 무엇이 희수를 병운에게 이끌었는지에 대한 서사가 필요했다.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만으로는 희수의 지난 일 년을 유추하기에 부족하다. 이러한 서사적 결여는 희수의 행위가 단순히 빚에 한정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단지 관객은 일 년 만에 채권자와 채무자로 만난 두 남녀가 빚어내는 재미있는 상황을 즐길 뿐이다. 특히 지하철 장면에서, 병운이 효도르라는 격투기 선수가 꿈에 나타나 “너 정말 괜찮아”라고 위로해줬다는 얘기를 할 때 불쑥 울음을 터뜨리는 희수의 행동은 상투적이다. 병운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빗대어 희수를 슬쩍 위로한다. 여기에 희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울음으로 반응한다. 희수의 울음은 지난 일 년이 힘들었다는 고백일 뿐 그녀의 내밀한 감정에 접근하지 못한다. 희수의 울음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자괴감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는 감정의 분출이 아닌 삶에 대한 성찰로 묘사했어야 결말의 의도와 부합한다.
이윤기 감독은 다이라 아즈코의 원작과는 달리 병운을 너무 ‘멋진 놈’으로 만들었다. 그가 애초에 세웠던 의도, 즉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영화의 성격 규정에 매몰된 탓이다. 그래서 <멋진 하루>는 캐릭터에 의존하는 영화가 되어 버렸고, 적극적으로 사용한 멜로적 장치는 중요한 과정을 놓치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라는 시간은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시간을 전제하는 이야기는 특별한 시간이 포착하는 일상의 발견을 통해 주제의식을 표현한다. 이러한 형식의 매력은 어제까지는 미처 몰랐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앎이 내일의 변화를 이끈다는 일상성의 반전에 있다. 끌레오*의 두 시간이나 므이시낀 공작이 전하는 길로틴이 떨어지기 1분전**이 이에 해당한다. 일상성은 제한된 시간의 맥락에 놓이면 그것의 이면이 사유를 풀어놓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일상의 이면의 모습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멋진 하루>의 ‘해프닝’이 사전적 의미에 갇히는 이유는 인물들이 구조화된 이야기에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현실에 밀착하지 못하고 그저 표피를 기록할 뿐이다. 그 결과 시간의 순서로 나열된 하루의 사건들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역할로 한정된다. 그래서 이윤기 감독이 제시하는 하루에 대한 논평은 설득력을 잃는다.
끝으로 <멋진 하루>의 아쉬움은 결말의 여운을 즐길 수 없다는데 있다. 희수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피식 웃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나야 했다. 뒤에 붙은 에필로그는―병운이 입에 달고 살았던 ‘스페인에 막걸리집’을 연상시키는 식당 간판과 병운과 희수가 도시에서 실패하기 전 말쑥한 차림으로 등장하여 연애를 막 시작하려는 과거의 순간 결말이 보여줬던 여운을 희석시킨다. 에필로그는 뺐어야 했다. 만일 앞서 지적한 부분들이 충족되었다면, <멋진 영화>에 대한 감상은 이렇게 마무리했을 것이다. <멋진 하루>는 이윤기 감독의 네 번째 작품으로, 데뷔작 <여자, 정혜-The Charming Girl, 2005>처럼 삶이 남긴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여자, 정혜’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세계 밖으로 내딛는 걸음은 <멋진 하루>의 ‘여자, 희수’로 이어진다. 그래서 “꿔 간 돈 갚아!”라는 그녀의 일성은 ‘이제 세계와 관계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희수가 된 정혜, 정혜로 살았던 희수는 과연 껍질을 깨고 아브락사스로 날아갈 수 있을까? 하루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다.
* 아녜스 바르다의 1962년 작, <5시에 7시까지의 끌레오-Cléo de 5 à 7>의 여주인공.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믿는 끌레오가 의사의 최종진단이 나오기 전까지 보내는 두 시간으로, 그녀는 파리 시내를 배회하며 일상적인 것들의 재발견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1868년 작 <백치>에서 사형수가 느끼는 일생보다 긴 순간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열망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사유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다.

 
글_ 윤결 ds@dancingspider.co.kr 영화 시나리오 작가 사진_네이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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