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엿듣기 3]쇤베르크의 낭만, 정화된 밤

춤추는거미 | 2009.06.18 01:59 | 조회 8221

[클래식 엿듣기 3] 쇤베르크의 낭만, 정화된 밤


혁명가, 쇤베르크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12음 기법은 20세기 음악계의 최대 혁명이다. 그것은 옥타브(octave) 내 열두 음들이 독립성을 갖게 됨으로써 모든 음들마다 고유한 중심축을 형성하여 종전의 조성 음악의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다. 12음 기법을 사용한 음악에는 종지도 없고 타닉(Tonic)과 도미넌트(Dominant)(화성학의 개념으로서, 이를테면 C major 조성 내의 도미솔 화음과 솔시레 화음을 일컫는다)간의 관계와 기능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청중들이 이런 그의 음악 혁신에 큰 반감을 가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혁신의 결과물들에 대해서, 음악을 듣는 매순간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만 하는, 예상할 수 없는 음들의 향연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청중의 불만은 당연히 컸다.
낭만주의자, 쇤베르크
그러나 혁명가 쇤베르크의 모든 작품들이 모두 12음 기법으로 작곡된 것은 물론 아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작품은 그가 25세였던 1899년, 졸업 연주 작품으로 쓴 ‘정화된 밤(Verklaerte Nacht Op.4)'이다. 리하르트 데멜(Richard Dehmel)의 시에 토대를 두고 쓰였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달 밝은 밤, 낙엽이 쌓인 숲 속을 한 쌍의 남녀가 걸어간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어린이를 잉태하고 있다고 고백을 한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를 용서하고 그녀의 태내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이를 축복한다.
음악이 그렇듯, 시의 내용 또한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낭만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다 못해 병적이기까지 한 이 시가 한창 시절 작곡가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리라는 점을 우리도 공감할 수 있다(그의 또 다른 작품인 ‘달에 홀린 피에로’를 들어보라. 음악의 스타일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지만 선별된 텍스트의 내용 면에서는 이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애인이 타인의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충격적인 고백이 달 밝은 밤 숲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텍스트와 음악을 접한 ‘어떤’ 이들에게는 낭만을 느끼게 해줄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텍스트 자체는 정신병자들의 대화, 혹은 어느 정신병자의 고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시의 끝에 가서는 그러한 고백이 수용되고 또한 용서되며, 한술 더 떠 그 용서는 승화돼 장차 태어날 미래의 아이를 축복하는 시발점이 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텍스트에 대한 구구절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마침내 낭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인의 고백이 나오기 전 폭풍 전야의 불길함을 암시하듯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는 두 남녀의 발걸음에 맞춰 규칙적으로 D음을 연주한다. 그리고 곧 반음계의 선율들이 등장한다.
이어 여인의 고백이 힘겹게 등장하고 어조의 미세한 변화, 끊임없이 교차하는 감정의 미로를 힘겹게 빠져나오려는 듯 음악은 드라마틱한 구조를 구사한다.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텍스트가 눈앞에 떠오르고, 텍스트가 눈앞에서 아른거릴 때 즈음해서 영상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영상은 다시 음악 안으로 들어와, 음악 안에서 사라진다.
초여름 밤, 그리고 언젠가 꽉 찬 달이 떴을 때, 여러분도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들어보길 바란다. 단 애인 없이 혼자 들어 보기를.

글_김용희 ds@dancingspider.co.kr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과 전문사 과정 사진_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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