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서평]연애소설 읽는 노인

춤추는거미 | 2009.07.29 16:22 | 조회 6902


연애소설 읽는 노인

 

연일 비가 내리는 장마철, 집안에 있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동생의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동생은 필자와 다른 취향을 가졌기에 일단 가장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제목을 골랐다. 이름하야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었다. 연예소설과 노인이라는 상반되는 듯한 단어의 조합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여기서 연애라는 통속적인 로맨스를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사실 이 책은 장르 측면에서 본다면 환경소설에 속한다.
고독한 노인과 연애소설

물론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등장한다. 그는 조금씩 문명의 물결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아마존 부근의 ‘엘 이딜리오’라는 마을에서 혼자 외로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이기에 더욱 고독하다.
그에게도 젊은 시절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그 이유로 부부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소설 속 배경을 이루고 있는 남미는 아직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성한 처녀림이 가득한 시기였다. 때문에 이주라는 것은 생사를 건 모험이었다. 다행히도 노인은 자연의 가혹함에 맞서 생명을 끈질기게 유지했다. 반면에 아내에게 고향이란 생명의 토대였고, 그곳을 떠난 타지의 생활은 생을 위협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끝내 아이를 낳지 못하고 남편을 떠났다. 결국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시도했던 이주가 목적을 영원히 좌절케 한 것이다. 노인의 상심은 몹시 컸고, 그 인생의 쓰라린 경험이 그에게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성향을 만들게 했다.

자연 vs. 문명
노인은 아내의 짧은 생과 대조적으로 나이를 잊을 만큼 긴 생을 이어간다. 엘 이딜리오의 원주민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자연을 이용하여 의식주를 해결했고, 자연을 통해 과학을 깨달았으며, 자연에 맞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이는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원시적인 삶으로의 역행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독사에 물려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비에서 살아남자 더욱 대범해진다. 이는 어쩌면 자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을 위해 자연이 부여한 힘과 지혜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노인은 문명이 자행하는 개발의 논리에 냉소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소설에서 문명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읍장이 있다. 그는 오만하고, 비열하며, 탐욕스럽고, 그래서 불쾌하다. 그는 문명 속에서 얻은 얄팍한 지식이 삶의 전부인 양 착각하며, 법과 제도를 들먹이면서 원주민들을 멸시하고 탄압한다. 사실 그의 모든 권력의 원천은 총이라는 살상무기이다. 이 도구는 이성이라는 가면을 쓴 문명의 실상, 즉 타협의 여지가 없는 즉결성과 무자비한 야만성을 나타낸다.
어느 날 한 미국인이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며, 범인인 암살쾡이를 죽이기 위한 노인의 결투로 이어진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자의 여유로움 때문일까, 혹은 자연에서 얻은 지혜로움 때문일까. 그는 끔찍하게 살해된 시신들을 목격하면서도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의 연륜과 의연함으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다. 살쾡이의 무자비한 살인은 이유 없는 광기가 아니었다. 새끼들을 단지 사냥의 기쁨을 위해 죽이고, 남편을 고통스러운 부상으로 이끈 미국인, 즉 인간들에 대한 복수였다.
소설의 결말은 노인이 살쾡이를 죽임으로써 종결되는데, 이것이 전적으로 노인의 승리는 아니다. 애초에 노인과 살쾡이의 결투는 승패를 가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쾡이를 죽인 수단은 총, 즉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힘을 빌은 살상은 불평등이었고, 반칙이었으며, 자연에 대한 배신이었다. 하지만 노인에겐 어쨌거나 생의 의지가 있었으며 살기 위해서는 살쾡이를 죽여야만 했다. 즉 사생결단의 상황이었고, 거기서 총은 불가피한 도구였다. 그 때문에 노인은 살쾡이를 죽인 후에 씁쓸한 마음, 죄책감과 연민을 느낀다.
자연에서 배우는 진정한 휴머니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이후로 두 번째로 깊은 인상을 남긴 남미소설이었다. 남미소설은 대개 비현실적인 상황설정이 많고, 그곳에서 현실 세계에 대한 우의를 드러내곤 한다. 마르케스 역시 그런 성향이 다분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작가였다. 반면에 루이스 세플베다에게는 비현실성이나 과장성이 상대적으로 미약했지만 자연과 삶에 대한 성찰이 빼어났다.
소설을 읽다 보면 노인이 단순하지 않은 인생의 경륜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문명에서 우리가 배운 지식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단 여기에 감탄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으로 순수했다. 비록 지면상으로는 짧게 서술되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하찮은 것쯤으로 여기는 연애소설을 읽고 또 읽으며 언어가 주는 아름다움과 연인들의 사랑을 곱씹을 줄 아는 노인은 진실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순수성은 사실 그가 문명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문명의 통속성을 모르는 이에게는 사랑을 언어로써 재인식하는 과정이 참신한 삶의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노인에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는 감정은 자신의 온 마음을 집중시켜 이해해볼 만한 신비의 대상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 가만히 유년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나의 고향집은 사시사철 변하는 수목과 화초들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고, 상업적인 것들과는 비교적 거리가 먼 조용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자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싹텄고, 과학이나 문학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된 연원이 되었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가면서 자연보다는 문명의 지식을 배우는 일이 의무가 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배우는 지식 대부분이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이따금씩 깨닫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직은 무엇도 침범하지 않은 자연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원시적인 삶이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의 삶보다 훨씬 하등했다는 생각은 지극히 문명중심적인 생각이다. 물론 편리나 위생의 측면에서 동물적인 수준을 벗어났다. 그러나 원시적 삶 속에서의 인간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 속에서 생활했기에 문명이 초래한 질병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쓸데없는 고민에 휩싸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훨씬 삶을 밀도 있게 살았을 것이다. 물론 철저히 문명의 관점에서 서있는 교과서에 따르면 서구의 문물의 도입이 낙후된 봉건적 삶을 부흥시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타인종에 대해 야만적인 학살을 자행한 문명이 과연 선이었는가. 오히려 인류에게 더 많은 불행을 안겨다 준 것은 아니었을까.

 
글_인턴기자 나비ds@dancingspider.co.kr 사진_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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