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 아버지를 만나다

춤추는거미 | 2008.03.31 20:46 | 조회 818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 아버지를 만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맥 매카시의 원작 소설을 코엔 형제가 각색하여 연출한 영화다. 코맥 매카시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의 첫 구절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에서 제목을 따왔다. 노인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을 지칭한다. 나이가 든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에 놓여있다는 뜻이며 늙은 사람은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물리적 결과이다. 인간은 생성과 동시에 소멸로 진행한다. 예이츠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시구는 외형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산업사회에서 노인을 쓸모없는 인간쯤으로 치부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예이츠 역시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한다. 동시에 시간은 인간에게 선물을 선사했다고 지적하며 시간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가치에 주목한다. 그것은 노인의 지혜이며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이츠는 노구를 이끌고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를 감행한다. 비잔티움은 서유럽에 그리스정신을 전파한 곳이니까. 코엔 형제는 노인 보안관 벨을 통해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온 시간 즉 인생을 말하고 있다. 이 영화를 읽어내는 첫 번째 단서는 시간에 대한 이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세 남자의 이야기다. 돈을 갖고 도망치는 자와 쫓는 자 그리고 쫓는 자를 잡으려는 자. 장르가 그려진다.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대강의 이야기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한 사람씩 영화의 이야기 공간에 등장할 것이고, 이들의 공통분모를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게 할 것이고, 인물들 간의 갈등을 차츰 증폭시키면서 서사적 거리를 좁혀갈 것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관객의 기대를 유예시킬 것이며, 마침내 이들을 한 공간에 모이게 할 것이라는 등등의 예상들 말이다. 코엔 형제는 한 번의 배반을 위해 장르의 법칙을 따르는 척한다. 영화는 은퇴한 보안관 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잔인한 연쇄살인마에 관한 이야기다. 베트남 참전 군인인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우연한 기회에 거래가 틀어진 마약밀매현장에서 거액의 돈을 줍게 되고, 우연한 살인자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는 돈 주인의 청부로 모스를 쫓게 된다. 사건을 맡은 벨은 쉬거를 쫓는다. 관객 역시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전형적인 서스펜스를 경험하며 이야기를 쫓아간다. 코엔 형제는 자연스럽게 돈의 행방과 살인마와 보안관의 대결로 관객의 관심을 유도한다. 앞서 말했듯이 코엔 형제는 한 번의 배반을 준비한다. 배반은 영화의 주제로 연결된다.
벨의 목표는 사건을 해결하고 연쇄살인마 쉬거를 체포하는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씬에서 벨의 내레이션은 쉬거의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며 사형대로 보냈다고 증언한다. 관객의 궁금증은 벨이 어떻게 쉬거를 잡았을까로 모아진다. 관객의 기대가 머무는 곳에 연출자의 배반이 놓이게 된다. 코엔 형제는 쉬거의 이야기 공간과 벨의 이야기 공간을 교차로 대비해가며 영화의 주제를 견고히 만든다. 벨의 내레이션은 관객을 영화의 서사공간으로 이끌어주며 쉬거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하게 한다. 쉬거는 관객에게 잔인한 연쇄살인마로 각인된다. 반면 벨이 쉬거를 심각한 상대로 인식하기까지의 시간은 관객보다 훨씬 더디다. 코엔 형제는 일부러 벨이 쉬거보다 사건 현장에 늦게 도착하도록 만들어 인물간의 대결구도를 느슨하게 한다. 벨과 쉬거는 동일한 공간에 놓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둘은 갈등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관객에게 보여 지는 것은 단지 각기 다른 두 남자의 일상일 뿐이다. 이러한 코엔 형제의 서사 의도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관념으로 읽힌다. 이것이 두 번째 단서다.
쉬거는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 밖에 위치한 이질적 존재이다. 영화 속 모스나 벨의 경우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연속성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었고 현재는 어떤 욕망과 갈등에 사로잡혀 있으며 앞으로 그들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관객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쉬거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한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서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그에게 희생당하는 인물들은 그와 함께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쉬거는 미지의 대상이며 현실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가능태 중의 하나이다. 코엔 형제는 동전던지기라는 놀이로 쉬거를 형상화한다. 확률이 이분의 일인 놀이에 당신의 목숨을 걸 수 있겠는가? 쉬거에게 걸리면 그렇게 된다.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You don't have to do this!) 라고 외칠 뿐 소용없다. 쉬거는 코엔 형제가 던지는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극적장치로 작용한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쉬거의 폭력은 점차 일상화되고 관객은 쉬거가 행사하는 폭력에 둔감해진다. 그리고 벨의 내적갈등에 주목하게 된다. 지난 세월 켜켜이 쌓인 경험은 벨에게 통찰력을 제공한다. 시체가 즐비한 사건현장을 보아도 너무도 차분하다. 벨은 자신의 경험대로 사건을 구성한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그의 일상은 무료할 따름이다. 비워진 커피 잔을 알아서 채워주는 웨이트리스의 배려가 고마울 뿐이다. 영화는 은퇴를 앞둔 한 노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노인에게는 어제 터진 살인사건이 오늘의 회한보다 새롭거나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무대에서 내려온 노인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죽음을 준비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는 쉬거가 자행하는 무자비한 물리적 폭력보다 벨이 살아가는 일상이 오히려 잔인하다고 말한다. 이 잔인함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유한존재로서의 인간. 결국 인간은 시간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이것은 인간에게 필연이다. 코엔 형제는 당신이 기대하는 결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던 돈의 행방은 모호하다. 모스는 욕망을 취하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에서 우발적으로 등장한 쉬거는 역시 우연한 사고로 시간 밖으로 퇴장한다. 이제 노인만 남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노인 벨의 자전적 시선이다. 그래서 영화는 은퇴한 벨의 시간에서 출발하여 그가 기억하는 과거의 특정한 시간을 훑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은퇴한 벨은 식탁에 앉아 모처럼 아내와 마주하고 있다. 그의 표정이 어둡다. 노인에게 시간의 지속은 죽음으로 수렴해가는 것이다. 벨은 무엇을 직감했는지 어젯밤 꾸었던 꿈을 아내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두 가지의 꿈이다. 하나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벨은 아버지가 주신 돈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또렷이 기억나는 꿈으로, 벨은 자신보다 젊은 아버지-역시 보안관이었던-를 만난다. 꿈에서 벨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담요를 덮어쓰고 앉아서 불을 지피고 있다. 벨이 말을 타고 아버지를 찾으러 갈 때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벨의 꿈은 자신의 변명이다. 은퇴 후 적당한 소일거리를 찾지 못한 벨. 덧없이 밀려오는 지난 세월의 피로감은 현재를 과거에 가둬놓게 한다. 어젯밤 꿈속에서 만난 죽은 아버지에게서 벨은 일종의 복무감을 발견한다. 물질적 가치에 우선하는 도덕적 의무! 벨은 보안관으로 살았던 세월이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고 자평한다. 복무감은 노인 벨의 자위로 읽힌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을 먹먹하게 만든다. 인간이 고안해 내는 수많은 가치들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벨의 클로즈업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주름을 곧게 펴 박힌 시간들을 빼내 이어 붙여도, 시작과 끝이 보이는 유한한 직선일 뿐이라고.

글_ 윤결 ds@dancingspider.co.kr 영화 시나리오 작가 사진_네이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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