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장르의 공연미학, 인터디시플리너리 씨어터
공연이 끝났다. 대충 땀만 닦고 나서 방금 보여준 우리 작품에 대해서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러 다시 무대로 나간다. 정해진 시간 동안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화려한 배우로서가 아니라 공연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삶을 즐기고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들과 대화하러 나간다. 대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예술적 재료들(몸, 소리, 오브제, 비디오영상, 그림자, 회화)의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비주얼씨어터컴퍼니 꽃의 공연은 늘 관객을 조금은 불편케 한다. 이번에도 역시 한 관객이 질문한다. “왜 한 두 명의 작가가 창작과 공연에 관계된 모든 일을 다 하는가? 기존의 연극에서 작가, 연출가, 배우, 의상 디자이너, 무대 미술가, 안무가 등등이 나누어 할 일을 한 두 사람이 하면서 얻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글쎄…….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이런 식의 가내 수공업적인 작업 방식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효율과 경제성이라는 개념이 어느 시대보다도 강조되고 있으니, 예술 창작에서도 효율이라는 개념이 어떤 덕목처럼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예술에 있어서의 효율이란 무엇일까? 최소의 시간과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 효과라고 하면 어떤 효과?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창작자가 작품의 창작 과정에 수반되는 다양한 일들 사이를 넘나드는(inter-) 것은 분명 경제적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보자. <꿈 70-18> 이라는 작품을 만들 때 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늙음’을 느끼려고 무단히 애쓰고 있었다. ‘죽음’, ‘늙음’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가 그저 모호하고 일반적인 노인의 모습만을 떠올리게 했고, 나는 그저 어디서 본 듯한 노파를 흉내 내고 있었다. 안개 속을 헤매는 꼴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모호하게 남아있던 노파의 이미지가 마치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점점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은 재료를 고르느라 천 가게에서 보낸 몇 분 동안이었다. 책상 앞에서는 잘 잡히지 않던 노파의 이미지가 천의 색깔과 무게, 천의 흔들림, 비치는 정도, 그리고 천이 떨어지는 모습들을 비교하는 동안 나의 눈과 손과 귀를 통해 감각적으로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나도 알 수 없는 어떤 통로로 노파의 무겁고 느린 호흡소리, 손의 떨림, 하얗고 주름진 얼굴, 둔탁하게 떨어지는 어떤 것, 바람 속을 날듯이 떨어지는 어떤 것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감각적인 이미지들은 노파의 내면까지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죽음 앞에 선 노파의 내면, 젊음을 보내고 죽음으로 난 외길을 따라 혼자서 가야하는 노파의 마음. 그 순간에는 외면과 내면의 구분이 사라진다. 마치 삶처럼 말이다. 축 쳐지고, 늘어지고, 떨어지는 붉은 천이 바로 노파의 마지막 모습이고 마지막 마음이다. 극의 내용을 구축하는 일과 형식을 구축하는 일은 이처럼 동시에 이루어지며 서로 간의 소통 속에서 발전하게 된다. 연극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 중에서 가장 큰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은 언어였다. 언어는 전달해야 할 메시지이며, 중심이며, 뼈대이며,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대본을 수정하는 것은 극작가에 대한 모독이고, 배우란 대본을 충실히 무대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대도 있었다. 늘 의미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형식이 따라 온다. 그 순서가 뒤바뀌는 일은 없다. 형식에 분류되는 모든 요소들은 얼마나 극의 내용을 잘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평가된다.
그러나 의미 전달의 수단이라고 여겼던 그 다양한 수단들, 연극을 이루는 여러 재료 그 자체에 귀 기울이면 예상하지 못한 의미들이, 어쩌면 더 깊은 의미들이 그 속에서 얻어지고, 그것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극 전체를 몰고 가기도 한다. 이성적 언어의 그늘에서 벗어난 연기, 음향, 소품, 무대는 각각 움직임, 소리, 시각적 이미지, 공간, 오브제 등으로 확대되어 극 전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요소가 된다. 극적 재료들에게 더 많은 생명을 부여하는 이와 같은 시도는 무용, 음악, 건축, 회화, 인형극 등 타 장르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각 장르 간의 이질성을 너머서 장르간의 동질성, 혹은 장르 간의 충돌이 가져오는 효과에 더 주목하면서, 서로 다르고 그러나 또 같은 예술들 사이를 넘나들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다. 즉 무용, 음악, 건축, 회화, 인형극 등이 자연스럽게 공연의 틀 안에 들어와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이랄 것도 없이 오로지 창작자의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찾아가는 여정의 동반자로서 공연 창작 과정을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이때 특히 어떤 재료가 주도적으로 극을 전개시키느냐에 따라서 오브제 연극, 가면극, 비디오 영상극, 소리극, 조각 그림자극, 페인팅 퍼포먼스 등등으로 나뉘어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다양한 공연들은 모두 기존의 장르 개념 안으로 포괄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다양한 시도들을 ‘인터디씨플리너리 씨어터’ (interdisciplinary theater, ‘복합장르’, 혹은 ‘장르 혼합극’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도 있는데, 이 용어들 다양한 장르를 기술적으로만 결합시켰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안정된 테두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실험과 도전정신으로 장르 간의 벽을 허물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을 만드는 인터디씨플리너리 씨어터는 한편으로는 자유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미학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더 치열한 예술정신이 요구된다. 언어를 대신할 수 있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선별하고 다듬고 하나의 극 속에서 융합하도록 만드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각 요소들의 사용이 극의 중심과 항상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 어떤 것도 잉여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창작자의 의도와 예술관이 굳건해야 한다. 극을 이루는 각 재료들에 충분히 집중하되 그 재료들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재료만 보이고 집중력은 없는 졸렬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런 예들은 인터디씨플리너리 씨어터(interdisciplinary theater)라는 이름으로 공연되는 ‘멀티디씨플리너리 씨어터’(multidisciplinary theater)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여러 장르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서로 간의 아무런 유기적인 관계없이 함께 사용되는 멀티디씨플리너리 씨어터(multidisciplinary theater)속에는 관객들의 주의를 이끄는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인형들, 집중이 떨어지는 곳마다 기술적으로 배치하는 춤들, 무대 전환을 위해서 사용된 비디오영상을 볼 수 있다. 편리함에서 혹은 장르혼합 자체가 마치 트렌드나 되는 것처럼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연물에서는 각 재료들의 언어에 충분히 귀 기울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inter'의 정신을 볼 수 없다. 거기에서는 실험과 도전정신이 아니라 강한 상업성이 엿보인다. 혹은 우월감, 혹은 기회주의.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극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각 재료들이 모여 얼마나 강하고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내는가이다. 언어가 다하지 못한 말을 다양한 재료들로 말하기, 그 재료들 사이의 하모니가 더 큰 울림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확신. 모든 예술에 공통적인 언어,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언어, 오늘 찾았지만 또 내일은 잃어버릴 수 있는 언어, 무대에서만 살아나는 그 언어는 분명히 있다. 그 언어를 찾기 위해 삶과 예술, 안과 밖, 각 예술 장르 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과 몸에 대한 믿음, 그것이 인터디씨플리너리 씨어터(interdisciplinary theater)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_ 김진영 (jjjin323@hanmail.net) 극단 꽃 연출 및 배우, 서울대 용인대 강사 사진_ 극단 꽃 |